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1965년 11월 10일에 벌어진 [[해서파관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66년 상반기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5.16 사건]]과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으로 [[펑전]], [[양상쿤]], [[뤄루이칭]], [[펑더화이]], [[류사오치]] 등 중공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본격화했고 마오쩌둥이 [[경험 대교류 운동]]을 권장해 1100만여 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각지에서 베이징으로 몰려들어 '혁명의 교리를 교류'하면서, 베이징에서 시작된 광기는 중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후 홍위병들은 [[4인방]]과 [[린뱌오]] 등이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는 뜻의 주자파(走資派)라는 낙인을 찍은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을 무자비하게 핍박했고 시설 및 역사 유적들을 마구 파괴했다. 그러던 중 홍위병 내에서 혈통론이 제기되면서 홍위병들은 '보수파'와 '조반파'로 분열되었다. 보수파 홍위병은 고급 간부들의 자제로 구성된 홍오류였다. 그들은 홍위병 가입 기준을 출신 성분으로 삼고 비판 기준 역시 출신 성분으로 정해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테러를 자행했다. 이들의 테러가 매우 극렬해 베이징에선 8월에만 하루에 100명씩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었다. 이에 보수파에게 탄압받던 흑오류 출신 홍위병 조직이 곳곳에서 결성되어 이들에게 맞서게 되니, 이들이 바로 조반파 홍위병이었다. 1966년 10월 13일, 천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연설을 발표했다. 이 연설로 인해 보수파 홍위병들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추종하는 반동의 자제들이 되었고 조반파 홍위병이야말로 진정한 홍위병들로 떠받들어졌다. 조반파는 당내 고급 간부들을 가짜 혁명가, 반당 분자, 좌파 행세를 하는 우파로 몰아세우고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인민해방군]]은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막지 말라는 엄포를 놓는 바람에 무력화되었고, 조반파들은 아예 군대까지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보수파 홍위병 사냥에 나섰다.''' 보수파 역시 조반파에 맞서기 위해 '''군대 병영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조반파와 유혈 충돌을 벌임으로서''' 중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이무렵, 상하이에서는 목화공장에서 보위부 간부직을 맡고 있던 [[왕훙원]]을 중심으로 한 조반파 홍위병들이 노동자들을 선동해 공총사를 조직했다. 중국 공산당 상하이 시정위원회는 이 단체에 대해 "인정도, 지원도, 참여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공총사의 일부 회원들은 "베이징에 가야 한다."고 선전하고 상하이 인근의 안팅역 철도를 차로 봉쇄하고 31시간 34분 동안 상해-난징 노선을 차단했다. 이에 중앙문화 혁명 그룹은 사태 수습을 위해 장춘차오를 상하이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춘차오는 이 기회를 틈타 상하이 정부를 뒤집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으며, [[장칭]] 등 문혁소조의 극좌파들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